각설이 [463916] · MS 2013 · 쪽지

2014-02-02 20:44:59
조회수 4,883

그때의 당신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을 구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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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bgm으로 깔아봅니다. 감성변태 유희열님의 스케치북입니다.

내일부터 2015 수능 재도전을 위해 등록한 도서실에 출근(?)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재수하기 전에 '다짐'을 위해 값싼 감성적인 글을 하나 써서 남겨둘까 했는데 살짝 다른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제 주제에 맞지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오지랖 넓은 재수생의 애교 정도로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엄밀히 말하자면 반의 반 정도밖에 맛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입시철 수험생들은 유형이 참 다양하구나를 느낍니다.
우선합격되어 편한 마음으로 계신 분들, 추가합격권이 되어 줄태우는 심정인 분들, 어디어디 빵꾸가 뚫렸는데 그곳을 넣으려다가 말아서 아쉬움을 느끼시는 분들..

그 분들 중에는 올해 입시를 아쉽게도 실패로 맺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따지면 그 쪽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수능날 아쉽게 점수가 떨어진 분들, 잠시 방황을 겪으시다가 돌아오신 분들 등등..
누구든지 말로 풀어내기에도 너무 긴 사연을 가지고 있기에 함부로 유형화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오르비에 아예 멍석 깔고 폐인짓하던 도중 저와 같은 분들의 재수 다짐글을 수없이 봐왔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수험생활을 '비불능의 나날들'로 평가하시면서, 다가오는 그 해는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하셨지요.
'예전의 나'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며, '새로운 나'는 한없이 꾸준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순수한 열정을 욕보이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들께 감히 여쭤보고 싶습니다.
만약 수능을 본인 기대 이상으로 쳤다면 '예전의 나'를 한없이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할 용기가 있었을까, 라구요.

저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지나가는 길냥이 수준일 뿐이니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했던 제가 뭐라고 지적질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저 질문에 '잘보긴 했지만 내가 부족했다'고 쉽게 인정하실 수 있는 분들은 아주 많을 것 같진
않습니다.

얼마 전에 올린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12월 재수를 결심했을 때 저는 '내가 부족했어, 내가 공부 열심히 안했어'라는 생각으로 무장했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오를거야, 제대로만 하면 나에게 서울대 같은 건 꿈도 아닐거다 같은 헛된 망상까지 했구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니까 예전의 제가 너무 불쌍했어요.
물론 내가 공부 안하고 농땡이 부린 시간들, 방황했던 시간들도 적지않게 있기는 했지만..
항상 절박함을 가지지도 않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게 좋았든, 나빴든간에 '과거의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최선이었던 거예요.
남들이 보기에 부족하고 하찮지만 그때 제 엔진으로는 가장 멀리 갈 수 있었던 겁니다.

제가 그 생각을 하며 내내 괴로웠던건 제 열정의 시간들을 그저 결과에만 억지로 끼워맞추려니 거기서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주책없이 사춘기적 싸구려 감성글만 주구장창 늘어놨지만 민망함을 무릅쓰고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정말 20년 가까이 살면서, 무슨 일이든간에 열정적으로 보낸 시간이 하나도 없었나요?
그 긴 시간 동안 여러분은 항상 의지없는 사람, 게으른 사람일 뿐이었나요?
그 긴 시간을 되새겨봤을 때, 어쩌면 스스로가 생각해도 멋진 나의 모습이 있지 않았을까요?


다들 하는 이야기지만 수능은 결과싸움입니다. 그토록 열심히 했다고 해도 수능 성적표에 찍혀나오는 표준점수, 등급은 그걸
반영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노력을 했다고도 그런걸로 평가원느님께서 찾아와 오 너 빡세게 공부했구나 옛다 1등급 주마하는 일은 전혀 없지요. 안타깝게도요.

하지만 마찬가지로 수능을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흘린 땀은 표준점수로 등급이 매겨지지 않아요.
여러분이 그동안 해온 노력을 결과라는 틀에 애써 끼워맞추지 마세요.
몇달 전의 여러분을 못났다 못났다며 매질하지 마세요. 조언 그 이상의 잔소리는 하지 마세요.

대신 어릴적 부모님한테 그랬듯이, 여러분의 여자친구/남자친구에게 그러듯이 안아주고 사랑해주세요.
지금의 본인은 과거의 본인이 그토록 당신을 사랑해주었기에 있습니다.
모두들 수능을 보기 전날 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보상을 받을 준비를 하렴'같은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그 때의 여러분은 '미래의 나'를 아꼈다는 거예요. 그렇게 잘 대해준 '과거의 나'에게 인정은커녕 구박만 주고 있으면 얼마나 맘 아파할까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큰 스케치북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곳에 뭘 그릴지는 이제 각자 달린 일인 거예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모두 똑같이 잠재력이 무한합니다. 여기에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그때 그릴 수 있는 것을 그려갈 뿐이지요.

인정하세요.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는 크레파스들로는 내가 원하는 예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도 인정하세요. 그 때 쓴 크레파스들로 그린 그림들도 알고보면 충분히 예쁜 그림이었다고.
그게 내 기대에만 못 미쳤을 뿐, 이제껏 그려온 그림들은 분명 모두 예쁜 그림이었다고.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스케치북을 찢고 다른 것을 찾는게 아니라 그 그림을 좀 더 예쁘게 그릴 도구를 찾는 일입니다.


글이 너무 두서없네요. 저와 같은 여러분을 응원하고 싶었는데 이상한 말만 한 것 같아 조금 그렇네요 하하;
어찌 됐든 지금 이 길을 다시 걷는다는 건..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본인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열정이 있기 때문일테죠.

지금 갈 수 있는 쉬운 길들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피발바닥 될 걸 알면서도 가시밭길을 가려하는 우리 바보같은 2015 N수생들..
여러분이 그린, 지금은 창피하고 못나보이기만 하는 그 그림들마저도 저는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히 제가 여러분께 "그 그림은 충분히 아름다웠음을" 일깨워준 사람이 된다면 저는 아무렇든 좋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글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손발이 오글거려서 글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을텐데 꾹 참고 읽어주신 것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희생할 그림은 꽃나무가 가득한 그림이기를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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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공행마 · 475590 · 14/02/02 20:55 · MS 2013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앤괌 · 413214 · 14/02/02 21:05 · MS 2017

    당신의 그림을 응원합니다.

  • 아따까 온팩 · 346020 · 14/02/03 03:26 · MS 2010

    추천 2천개 드리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 오이이엉 · 464726 · 14/02/03 12:12 · MS 2017

    동감합니다.ㅋㅋ

  • 14설 · 442840 · 14/02/03 13:52 · MS 2013

    초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네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란 없다. 그냥 자기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 서희 · 370824 · 14/02/03 15:25 · MS 2011

    감사합니다♥

  • sky가고싶은재수생 · 492623 · 14/02/03 15:40

    정말 감사합니다^^

  • 오늘비 · 273506 · 14/02/03 16:53 · MS 2009

    글 너무 공감합니다.. 저를 비롯한 다른 수험생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 회색도시 · 389753 · 14/02/03 19:44 · MS 2011

    회색도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큰 그림을 완성하여야 한다"

  • 성의15여신 · 446819 · 14/02/03 19:56

    따지고보면 특별히 잘난사람도, 못난사람도 없는데 사람들은 결과만보고 그런 결과를 낳은 이유를 만드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저 모두 평범한사람인데 말이죠..^^..

  • 그래1년이야1년 · 492693 · 14/02/03 23:43 · MS 2014

    마지막 서핑이라 생각하고 눈팅중인데 정말 좋은글감사합니다..

  • Roop · 451596 · 14/02/04 01:43

    오늘부터 목표 수정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인생의 중요한 시기인 이 시점에, 난 더는 못하겠다 할만큼 미친듯이 공부했다면 그게 성공한거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결과가 좀 미끄러졌더라도, 그 값진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거니깐요.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발등찍는지구과학 · 479615 · 14/02/04 15:18 · MS 2017

    눈물나네요ㅜㅜㅜ

  • 처니 · 475221 · 14/02/04 15:28 · MS 2013

    ㅜㅜ

  • 가움★ · 492552 · 14/02/04 19:17 · MS 2014

    맞아요.작년 한해 재수하면서 성적잘나올때는 내 자신이 그렇게귀하고 자랑스러울수가 없었는데,수능을 잘 못본 이후부터는 계속 나 자신을 몰아세우고있었네요. 치열하게 공부했던 기억은 묻어두고 아쉬웠던 일만 생각하고..이제부터라도 다시 사랑해줘야겠어요ㅜㅜ감사합니다..

  • 존나공부안함 · 486795 · 14/02/04 20:05 · MS 2014

    저는 다른케이스같군요 진짜로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기에 인정은 못하겠고 구박 좀 해야겠습니다

  • 아따까 온팩 · 346020 · 14/02/04 20:08 · MS 2010

    닉에서 느껴지네요
    반성하시고 변하신다면 좋은 결과 있을거에요 화이팅

  • 와신난다 · 473523 · 14/02/04 21:35 · MS 2013

    고마워요 정말정말

  • pairry · 445688 · 14/02/04 22:51

    추천 백만개 찍어드리고 싶네요 큰 깨달음 얻어갑니다 ..이런 글 너무 좋아요ㅎ

  • 제랄동 · 450501 · 14/02/05 17:01 · MS 2017

    미친글이네요.. 너무 공감합니다

  • 살려는드릴게 · 458467 · 14/02/05 19:36 · MS 2013

    글 정말 잘 쓰셨네요... 눈물이 나네요ㅠㅠㅠㅠㅠ
    그동안 가장 나를 하찮게 본 건 주변도 아니고 스스로였네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올한해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ㅠㅠㅠ

  • 연고주세요 · 489459 · 14/02/06 02:38 · MS 2014

    각설님..^^ 따뜻하신 분임에 좋네요~

  • destined for SNU · 483039 · 14/02/09 12:45 · MS 2013

    정말너무좋은말이예요..............매번결과에맞춰구박하고면박주던저자신에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좀더안아주고한번ㅂ만더해보자고.....해야겠어요

  • 늦오 · 468022 · 14/02/09 13:44 · MS 2013

    후회를많이하는성격인지라 지난 20?19?년간 하루에도 몇번씩 후회에후회를 거듭하고 자책하는것을 일상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ㅋㅋ
    그로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고3어느날 자기방어본능이 발동했던지 이런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내가 했던일이 좋았든 나빴든 그것은 그당시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결정이었다구!'
    이후 주위를 둘러보니 그때이렇게할걸저렇게할걸 하며 괴로워하는사람이 수도없이만더군요 저와같은깨달음을얻었다면 과거의일로 후회하지않고 '지금'할수있는일에 최선을다할텐데말이죠ㅜㅜ저와같은생각을한사람을찾아볼수가없더군요ㅠㅠ
    이런경험이있던저로서는 님글을 읽으니 표현할수없을정도로 반가움이 밀려오네요ㅋㅋㅋㅋ반갑습니다 각설이님!!나와같은생각을하는 동갑내기가있었다니!!!!ㅋㅋㅋ

    저도 재수든반수든 올해 재도전을 하게되었답니다ㅎㅎ같은마음으로 열심히 해보자구요!

  • 에리꾸 · 407975 · 14/02/14 23:12 · MS 2012

    어쩌면 이런글을 읽고싶었는가봐요ㅜㅜ
    따뜻한 글 정말 잘 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뚜비야놀자 · 424428 · 14/02/18 03:16 · MS 2012

    저도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