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4색 당파로 분류되는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중에 우리는 남인과 북인의 분당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노론과 소론의 분당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른다.
붕당 정치에 대해 배울 때 동서 분당은 척신 정치 청산과 이조 전랑직을 둔 심의겸과 김효원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했고, 다시 동인의 남북 분당은 서인이 정철의 건저(세자 책봉) 건의로 실각하자 기축옥사(정여립의 난) 때 화를 입은 동인의 서인 처벌 수위 문제를 놓고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고 배운다.
그런데 의외로 서인의 노소 분당에 대해서는 대개가 경신환국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이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분당했다고만 배운다. 또는 경신환국 이후 실각한 남인의 처벌 수위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갈렸다는 정도로 배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피상적이다. 동서 분당과 남북 분당은 이조 전랑과 기축옥사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압축과 설명이 가능한 데 비해, 노소 분당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 정도로 여러 가지 사건이 뒤섞여 있는 탓이다. 그래서 교과서든 참고서든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배경1.
노소 분당의 첫 번째 배경은 척신 정치에 대한 시각차다.
흔히 우리는 숙종대의 붕당 정치가 남인과 서인의 핑퐁 게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숙종 즉위 초반에는 남인과 서인 사이에 '척신' 세력이 존재했다. 이들 척신 세력은 광산 김씨 김만기(숙종의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청풍 김씨 김석주(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사촌오빠), 여흥 민씨 민정중(숙종의 두번째 부인인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등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서인에 속했지만 서인의 당론보다는 숙종의 왕권 강화 및 자신들의 세력 강화에 힘썼다.
특히 김석주는 당대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이는 효종대까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간다.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은 반정에 참여했던 공서와 참여하지 않았던 청서로 나뉘고, 효종조에 이르면 다시 공서는 김자점을 영수로 하는 낙당, 원두표를 영수로 하는 원당, 청서는 김육을 영수로 하는 한당, 김집을 영수로 하는 산당으로 나뉘는데, 김육이 바로 김석주의 할아버지다. 그리고 송시열은 산당의 영수인 김집의 문하(송시열은 김집과 그의 아버지 김장생으로부터 수학했다. 김장생은 이이의 수제자였다. 즉 서인의 학맥은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진다)였다.
효종 이후 공서 세력은 몰락하고 청서가 한당과 산당으로 분열해 견제와 갈등을 빚었는데 김육의 두 아들인 김좌명과 김우명 대에 이르러선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김우명의 딸이 현종 비(명성왕후)가 되면서 청풍 김씨 집안이 외척이 된 것이다. 그러자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은 외척이 조정의 중대사를 맡을 수 없다며 청풍 김씨 집안을 철저히 견제했고 결국 김좌명은 물론 그 아들 김석주도 대과와 소과에 장원 급제하는 출중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크게 쓰이지 못했다. 송시열에 대한 김석주의 앙금은 곧장 남인을 이용해 송시열을 치는 지경에 이르는데 이것이 예송논쟁의 비하인드 스토리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척신을 활용했다. 이 시기에 김석주와 함께 전면에 등장하는 또 다른 외척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만기의 삼촌이자 김장생의 손자가 되는 김익훈이다. 김익훈은 김석주와 함께 경신환국에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숙종의 신임을 받아 군권의 요직에 오른다.
그런데 이후 문제가 생겼다.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축출한 김석주는 한때 남인과 결탁했던 인물로 남인의 재발호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인을 아예 뿌리 뽑기 위해 옥사를 조작하는데 여기서 김익훈이 주도적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국청 과정에서 옥사는 곧 무고였음이 드러나고 김익훈이 조작한 사실도 밝혀졌다. 척신 정치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서인 내 신진 세력들이 3사를 중심으로 김익훈을 강하게 비판한 건 당연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송시열이 김익훈을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내 노장 세력은 예송논쟁에서 남인에 의해 직접적으로 화를 입었고, 따라서 남인을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역당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익훈의 방법이 다소 잘못된 면은 있지만 남인을 축출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쯤은 무방하다고 봤다. 더구나 김익훈의 할아버지는 김장생으로 송시열의 스승이었다. 사적으로도 송시열은 김익훈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송시열의 이런 태도에 신진 세력은 크게 실망했다. 이것이 노소 분당의 첫 번째 배경이다.
배경2.
노소 분당의 두번째 배경은 송시열과 윤증 간의 정치적, 개인적 갈등이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성혼의 외손자로 송시열과는 막역한 사이였다(소론이 성혼의 학맥을 잇는다는 견해는 윤선거의 혈통과도 관계가 있다). 윤증은 김집의 주선으로 송시열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이처럼 돈독했던 송시열과 윤선거의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하니 그 원인은 바로 윤휴였다.
남인인 윤휴는 송시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학자였다. 송시열보다 10살 어린 그는 20살 때 송시열과 처음 만났는데 이때 학문에 대해 며칠을 밤낮으로 토론하고 송시열이 송준길에게 "우리가 30년 동안 읽는 책은 다 헛것이었다"는 편지를 쓸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이후로도 20여년 간 둘의 우정은 계속됐는데 말년에 문제가 생겼다. 윤휴가 유교 경전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달자 주자를 하늘로 섬기며 신앙시했던 송시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그의 학문이 아깝고 개인적으로 우정을 쌓아온 세월이 있기에 윤휴를 설득해 그의 생각을 고쳐보려고도 무던 애를 썼지만 윤휴는 "어찌 주자의 말만 옳고 나는 그르단 밀인가"고 되받아칠 뿐이었다. 결국 송시열은 윤휴를 성리학을 더럽히는 '사문난적'으로 규명하고 그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런데 윤선거는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게 화근이었다. 윤선거는 윤휴의 학문을 아꼈고, 또한 송시열의 주자 신봉에 대해서도 조금은 불만이 있던 차였다. 송시열은 그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결국 어느 날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며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경고했다. 윤휴를 아무리 아끼지만 주자를 무시할 수 없었던 윤선거는 "음양으로 따지면 주자가 양이고 윤휴가 음이며, 흑백으로 따지면 주자가 백이고 윤휴가 흑이다"고 말해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와 갈라섰다고 믿었다.
그리고 윤선거가 죽었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제문을 보내 조문했다. 윤휴도 제문을 보냈다. 그런데 윤선거의 아들 윤증이 윤휴의 제문을 돌려보내지 않고 받았다. 송시열은 그게 너무 화가 났다. 윤선거와 윤휴가 사문난적 시비 이후에도 절교하지 않고 계속 왕래했다고 확신하게 됐다.
이후 윤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명을 부탁했다. 묘갈명이란 묘비에 죽은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해 적는 것으로, 윤증은 당연히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했다(주변에서는 모두 말렸다). 그런데 이 무렵 이미 윤선거에 대한 배신감에 화가 나 있던 송시열은 묘갈명을 써주긴 하되, 굉장히 성의없게 써줬다. 당황한 윤증이 몇 차례나 다시 써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마찬가지로 성의가 없었다. 이로 인해 윤증은 송시열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신진 세력이 윤증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기성 사림이 송시열을 중심으로 똘똘 뭉처 노소 분당이 가시화됐다. 그러자 민정중이 송시열, 박세채, 윤증을 초빙해야 한다는 조정책을 내놓았다. 송시열과 박세체는 조정에 입조했지만 문제는 윤증이었다. 윤증을 설득하기 위해 박세채가 찾아갔더니 윤증은 입조의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내놓았다.
1. 서인과 남인 사이의 해묵은 원한을 풀 수 있나?
2. 척신 정치를 청산할 수 있나?
3. 자기 편만 등용하고 상대 편은 밀어내는 폐단을 극복할 수 있나?
1번에는 송시열이 간접적으로, 3번에는 송시열이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이 조건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송시열, 박세채, 윤증 모두 조정에 입조하지 않았다. 이후 윤증이 송시열을 정면으로 비판한 신유의서(정치적 편견으로 남인을 축출하고, 주자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점 등을 비판)가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에 의해 송시열에게 알려지면서 둘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이러한 송시열과 윤증 간의 일련의 사건을 회니시비라고 한다.
이후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갈라지고, 양자 간의 갈등과 정쟁은 숙종이 기사환국을 감행하는 단초로 작용한다.
...
일요일이네요.
일하기 싫을 땐 뻘글 투척이 제맛... 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
배경2는 고종훈 샘이 얘기해주셔서 알았는데 배경1은 처음 봤어요ㅎ 유익하고 재밌네요!!!! 동서붕당부터 시파 벽파 나뉘기까지 한번 정리해주실 생각은 없으세용? ㅎㅎ
언제 시간 나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 ㅎ
하는 김에 사화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죠. ㅋ
네네 기다릴게요!!! 책 쓰시다가 가끔씩 써주세요^^ 이과로 돌렸지만 조선후기는 정말 놀랍고 신비로운(?)일들이 참 많았던 거 같아요. 한참 한국사 기본서 읽으면서 에휴 고종 바보바보 이러면서 안타까워하며 책읽다가 '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다.' 이 부분을 읽고 눈물흘린 적 있었는데.. 그 부분을 쓴 역사학자께선 매우 담담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쓰노라 썼던 문구가 어찌나 슬프게 느껴지던지요.. (아침부터 뻘댓글 죄송^^;;)
남인북인은 들어봤는데 노론소론은 처음이네요...이시대에 새누리와 새민련의 개싸움이그냥 나온게 아닌것 같아요
혹시 한국사 교재는 올해 나오는건가요?
네, 올해 나옵니다. ㅎ
한일의정서가 노무현,이명박,박근혜로 대표되는 영남패권주의자들의 의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약정과 사실상 동일하다는것도 국사책이 외면하는 중요한 사실이죠.
오... 모르던 부분 감사합니다